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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의 역사



    은본위제 → 화폐의 가치를 은에 직접 연동시키는 제도




    유럽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금의 부족으로 은본위제에 가까운 화폐정책을 펼쳤다. 다만 이론상으로는 금본위제와 은본위제를 동시에 사용하는 복본위제도를 시행했다. 이후 19세기 은의 가치 폭락으로, 당시 대영제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며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이 19세기 말에는 금본위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중국은 은본위제의 가장 대표적인 국가였다. 현대의 흐름이 금본위제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아직도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은과 역사가 깊은 국가이다. 16세기 명나라는 교역을 통해 은을 많이 축적했으나, 1585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대영제국에 무너지며 은의 공급이 17세기를 기점으로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국가 경제가 무너졌다. 심지어 관료들이 은을 모으기 위해 집과 국민들의 무덤까지 조사했으며, 이웃나라였던 조선은 막대한 은을 조공하였다. 이후, 19세기에 마제은이라 불리는 화폐 가치가 높은 은화가 각종 거래에 사용되었고, 대표적으로 19세기 영국과의 차, 비단 무역에서 막대한 은을 모았다. 영국은 훗날 무역으로 손실한 은을 되찾기 위해 인도산 아편을 청나라에 판매했고, 이후 벌어지게 된 것이 유명한 아편전쟁이다.


    청나라 멸망 이후 은본위제를 포기하고 금본위제로 개편을 시도했으나, 자본 부족과 같은 굵직한 이유로 포기하였다. 이후 1934년 6월 20일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가 은구입법을 실시하면서 2억 온스에 달하는 은이 유출되게 된다. 이후 은 유출 현상이 심화되며 찾아온 경제위기로 인해 법폐개혁을 통해 은본위제를 폐지하고 관리통화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금본위제 → 화폐의 가치를 금에 직접 연동시키는 제도


    리디아 금화, 솔리두스 금화, 디나르 금화, 소버린 금화 등 금을 화폐로 이용한 역사는 꽤나 오래 된 이야기이다. 금 화폐는 예로부터 그 희귀성 때문에 안정적이고 화폐로써의 가치가 높았다. 이후 근대에 와서 패권 국가의 화폐만 금과 교환할 수 있도록 교환 비율을 정하고, 다른 국가들이 강대국가의 화폐와 자국의 화폐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 패권국가로는 영국과 미국이 있었다.



    1865년 창설하여 1927년 해체된 Latin Monetary Union은 유럽의 단일 통화를 위해 만들어진 기구였다. 1865년부터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가 이 통화동맹 설립에 대해 동의하여 금과 은의 통용 비율을 정했고, 이후 유럽 북부와 세느강 유역에서 금본위를 선호했고 독일 또한 금본위 선호가 늘며 1867년 파리 국제회의에서 국제 통화로 금본위 프랑이 거론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와 교역이 있었던 지중해와 대서양의 항구도시들은 복본위제도를 선호하고 있었다. 이후 1890년대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금본위제 전환을 하며 금본위제 시대가 막을 올렸다.



    금본위제는 화폐를 안정적으로 수급하며 물가를 안정시키고, 고정환율을 유지하며 환율 변동으로 인한 위험을 줄이는 것에 강했다. 하지만 높은 생산성을 지닌 경제체제 하에서는 디플레이션을 유발하고, 통화정책이 불가능해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각국은 2차 세계대전까지 금본위제를 유지하게 된다.




    브레튼 우즈 체제 → 금 대신 달러에 화폐의 가치를 연동시키는 제도




    제 2차 세계대전을 겪고, 금융질서를 재정립 하기 위해 소련을 포함한 44개 국가와 전문가들이 참여한 브레트 우즈 회의에서 미국의 입장에 따라 달러화를 기축으로 한 Bretton Woods system이 자리잡게 된다. 미국의 입장이 받아들여진 가장 큰 이유는 세계 2차 대전동안 미국의 물자가 금으로 교환되고 패전국들이 막대한 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며 미국이 전 세계 금의 2/3 이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파워를 바탕으로 브레튼 우즈 체제 하에서는 기존의 금본위제와는 다르게 미국만 금 태환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다른 국가들은 모두 미국 달러(USD)와의 연동을 통해 금과 연결되게 된다. 이후 다른 국가들의 화폐가 환율로 달러와 연동되고, 달러는 35달러 당 순금 1온스로 화폐가치를 고정시켰다.  

     

    이후 여러 부작용이 있었고 최근에는 Triffin''s dilemma 이론이 발목을 잡고 있다. 국제 거래에서 달러를 주축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달러를 시중에 많이 유통시켜야 한다. 하지만 달러를 많이 유통시키게 되면 달러 가치가 떨어지게 되는 효과가 나타나고, 달러 가치를 위해 통화량을 조정하면 화폐량의 부족으로 각국의 경제와 무역에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현대의 미국이 세계평화의 수호자이자 질서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이면에는 국방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1955년에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며, 미국은 약 30만 명의 사상 피해를 입게되고, 2천 억 달러 규모의 전쟁비용을 지출하였다. 재정적자 누계는 1500억 달러에 이르렀고, 이 정도 규모의 달러를 시중에 유통시키다보니 달러의 가치가 자연히 하락했고 인플레이션이 생겼다. 이후 무역수지 적자가 심해지고 달러의 가치가 요동치며 많은 사람들이 은행을 찾아가 달러와 금을 바꾸려 했다. 결국 1971년 닉슨대통령은 달러와 금을 바꿀 수 있는 권리를 없애는 금태환정지 선언을 했다. 브레튼 우즈 체제가 깨진 것은 자연한 결과였다.

    1970년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의 중동전쟁, 이란의 석유수출 중단으로 인한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며 금으로 바꿀 수 없는 달러는 화폐의 가치를 상실하며 끝없이 추락했고 미국은 물가상승과 경기불황이 겹친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다. 당시 미국 연준의 의장을 맡고 있던 폴 볼커(Paul Volcker)는 긴축정책이 단기적인 불황을 초래하지만, 장기적으로 생산성 향상과 이윤상승을 가져온다는 관점을 고수하며 기준금리를 연 20%까지 끌어올리는 초 고금리 정책을 펼쳤고, 국제경제와 금융자본이 연동적으로 움직이던 때가 아니었기에 인플레이션을 효과적으로 이겨내게 되었다. 이후부터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표로 하는 통화 기조가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금태환정지선언 이후로 고정환율제의 붕괴와 현재의 달러본위제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현재는 변동환율제의 근본적 문제인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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